[GN문학] 주기철의 포토에세이 '레퀴엠, 버려진 것들의 노래'

승인2019.06.01 13:28l수정2019.06.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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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버려진 것들의 노래


詩 주기철
사진 주기철
 

 

어떤 緣

 

우리는 왜
하늘을 탐내는
아지랑이로 만났을까
오르지도 못하고
증발하고 마는 몸부림인 것을

우리는 왜
하얗게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로 만났을까
억겁을 사위여도
멈추지 못할 춤인 것을

우리는 왜
비명에 떨어지는
낙엽으로 만났을까
울긋불긋 추억을 반추하다
종영되는 꿈인 것을

그러다가 오늘 밤
우리는 왜
펑펑 쏟아지는 눈으로 만났을까

 

 

꽁초들

 

보통은 압살이다
양반님네 즐겼던 압슬(壓膝)처럼
손가락 끝에 짓눌리는 명줄
불어오는 시류 따라 갖은 아양
꿈같은 몸짓으로 교태까지 부려보았지만
비명의 틈조차 없는 압살이다
아직도 허공에는 마지막 살랐던 삶의 흔적이
스피노자의 사과처럼 매달려 있는데

효수(梟首)
올빼미의 머리통을 닮았다던가
간두 끝에 매달린 참수된 대가리를 보라
흙먼지 일으키는 광풍에도 껌뻑이지 않고
분리된 제 몸을 찾고 있는 눈알을
똑바로 쳐다보란 말이다
교수는 남았지만 참수는 없어졌다?
그렇지만 이제 망나니의 칼이 없어도 목을 딴다
집게손가락 손톱 위에 봉숭아 꽃잎 가면을 쓰듯
분노를 뒤집어쓴 날(刃)
기요틴의 그 생생했던 날(日)들을 추억하며
녀석의 모가지를 내리치면

철 지난 낙엽처럼 거리에 나뒹구는 대가리
몸뚱이를 잃어버린 대가리에 머물렀던
마지막 의식 한 자락이
채 눈감지 못한 절두산의 넋을 그리며
끊어져 가는 명줄 부여잡고 세상을 올려다본다
망나니들의 세상을 올려다본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달도 없이 어둠 내린 도시
간선도로를 따라 줄을 맞춰 하나 둘 셋 넷....
나트륨에 중독된 달맞이꽃들이 노랗게 비추고 있다
장단이라도 맞추자는 것일까
무서운 질주 뽐내는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이 몇 개
그 사이로 문득
차창 밖으로 등 떠밀리는 죽음 하나 보인다
통곡하듯 살려 달라 자욱하게 목쉰 소리는
발광하는 카스테레오 하드락에 묻혀 버리고
온 몸 바스라질 때 목청 찢어 일장춘몽
화려한 불꽃 놀음으로 생을 접는다

이제
죽음을 희롱하고 싶거든 작은 유리병을 준비하라
겨울하늘 냉랭한 햇살처럼 투명하면 좋겠지
생매장, 관 뚜껑을 닫아라, 그리고
유리된 공기 속
진행 중인 죽음을 만끽하라
이쪽과 저쪽의 의미를 반추해 보면서
추억 짙어 갈수록 흩어지는 의식
그 의식의 끝에 어떤 한이 맺히는지
똑바로 보아야 한다.
늙은 사디스트의 충혈된 시선으로
회전의자 돌려가며 물고문 즐겼음직한
웃음 몇 방울 흘릴 수도 있겠지

바람이 울어줄까
바람이 달래줄까
바람이 불어오면
세상 가득 시체 썩는 냄새
시구문 밖 버려진 시체처럼
여기저기 쌓여 가는 주검들
구름도 없이 텅 빈 하늘
풍장의 설움 알 리 없는 까마귀가
선회를 마칠 즈음
구사일생
살육의 시선 피해
주검들 사이 비밀스런 환생이 꿈틀거리고 있다
반역의 꿈을 가진 불꽃 하나 잉태하고서
출산의 진통과 함께 떠오르는 봉화
한을 풀어, 분노를 엮어 세상을 태울 것이다
푸닥거리, 살풀이, 춤추듯 세상을 태울 것이다
노아의 잠 깨우는 빗줄기가 시작되는 그 날까지
활활……

 

 

처가살이 일기

 

1.
민달팽이
20세 때 나는 자유였다
어느 땅바닥에 뒹굴어도
세상은 모두 내 것이었고
달팽이
우쭐대던 녀석의 집 따위는
발목 잡는 귀찮은 짐일 뿐이라고
어딘가 있을 약속의 땅을 찾아
21세기로 진화한 나는
촉수도 씩씩하게 앞으로만 내달렸다
그저 그뿐이었다
세월은 바람처럼 무심하게 스치고
불혹의 외투 깃을 여미던 어느 날 오후
꾸벅꾸벅 민달팽이는
달팽이가 되고픈 꿈을 꾸고 있었다
길은 건조한 미로였고
지키고 있는 파수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퉁이를 돌거나 전봇대를 지날 때면
삼삼오오 담배를 빨아 대는 아이들이 보였지만
모두 내 새끼는 아니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후회가 편했던 건
내 젊은 날의 자유나 약속의 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가위 눌린 잠 같기도 한 오늘은
이사 가는 날
서울은 내게 전세방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억이 없어 억울한 내 집 한 칸
달팽이들의 춤사위가 흐드러지는
재개발의 청사진 위에서 떡고물이나 기웃
변죽도 못 울릴 처가살이를 시작한다
버릇처럼 소주잔을 흘리다
회색빛 웃음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2.
선배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천만 원만 꿔 달라는 말에
포장마차, 꼼장어, 소주 한 잔 얹어 놓는다
사과나무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술값은 지가 낸단다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만 하다며
저기 하늘 꼭대기
애드벌룬만한 희망을 안겨준다
빌어먹을 하늘 파랗기도 하지
솜사탕만도 못한 구름 한 점, 퉤-
선배는 카드결재 안 된다는 주인장에게
카드 한 장 빼들고 실랑이 중이다
아무래도 술값은 내 몫인 듯하다
배부른 자들의 희망은
언제나 그렇게 하늘을 떠다니는 것일까
핑 도는 눈물 사이로
길거리 가방 파는 목소리가 하나 끼어든다
좌판에 널린 희망이 목소리만큼 커 보인다
명품으로 변장한
그 뻔뻔한 낯이 뜨거울 만도 하건만
그럴수록 더 큰소리로
“나, 물 건너 왔어!”
길거리 좌판을 휩쓸고 가는 빠리 바람, 밀라노 바람
온통 짝퉁인 세상
희망마저 짝퉁인 거라


3.
사슴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다지
욕되게도 기다란 모가지
목구멍이 포도청인 게야
참 지랄 같은 세상
오늘은 넥타이를 매다가
그렁그렁 사슴 눈을 닮은 나를 만났어
켜켜이 어둠을 껴안은 장롱 속 거울 앞에서
아직 살아 있었냐는 안부대신
목을 졸라버렸지
욕된 호흡일랑 자신 있게 차단해 버리자구
저기 어둠 속
언제든 나를 반기는 회색 낯의 친구
흥얼거리는 랩송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청해 오는 어깨동무의 달콤한 유혹은
언제였던가 소풍처럼 기다려지기도 하지
그러나 여기가 끝이야
낯익은 마누라의 소프라노 목소리는
메시아의 구원을 흉내라도 내듯
어둠에서 나를 건져내 출근을 시키고
야트막한 자존심 한 켤레 구겨 신은 아침
“장모님, 장인어른, 다녀오겠습니다”
집주인 양반은 여전히 대답이 없지


4.
재수 없는 새끼
18층 남자가 투신을 했다, 낙엽처럼
그 날도 주식은 어딘가를 향해 곤두박질이었고
매스컴 속에선 이미 몇 사람이 뛰어 내리거나
목을 매단 뒤였다
신기루......
떳다 지는 해처럼 어디에도 흔적이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18층 남자가 있었고
나는 그 남자를 18놈이라 불렀다
18놈, 너무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지만
그렇게 부르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운동할 시간도 없다는 너무 잘 나가는 남자
출근길, 퇴근길
그 18놈은 얼마나 오래 살려는지
생각하기도 싫은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렸다
가끔은 동갑내기 벗 삼아 발을 맞춰보기도 했지만
완주는커녕 10층을 넘겨본 적도 없었다
에이, 18놈 잘 먹고 잘 살아라
어쩌다 나누는 엘리베이터 앞 눈인사 뒤에는
언제나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자격지심
17층 처가살이로 소문 난 나는
벌거벗은 몸뚱이에 자존심만 치렁치렁
자랑할 것 없는 장신구는 왜 그렇게도 반짝이는지
묘한 표정을 짓는 마누라의 비수가 아픈 밤
해를 품은 해바라기처럼 천정에 잠을 그려본다
이런 개지랄 같은 세상이 있나
잠자리에서마저 그 18놈을 올려봐야 하다니
그렇게 잠을 설친 날이었다
재수 없는 새끼는 죽어서도 재수가 없다
오르락내리락 수많은 날 연습한 보람을 팽개치고
출근길에 23층 옥상으로 향했단다
추......락...... 하는 게 아름다웠을까
18놈이 아스팔트 위 화석으로 눈인사를 청한다
아직 마르지도 않은 선혈 뒤에 숨어있는 시선
천 년이 지나도 지워질 것 같지 않은 그
시선을 피했어야했는데
마지막 살아 있었던 옥상 위엔
그저 텅 빈 하늘만
나는 또 어디 가서 쨍한 해를 찾아볼까

 

카메라 Panasonic GH3, GH1
렌즈 Canon J16a*8 b4, Panasonic 14-14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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