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사진=문화재청)
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사진=문화재청)

화협옹주 묘 확실, 영성위 신광수와 합장묘
화장품 고형물, 일본산 청동거울 등 발견
당시 왕실 여인생활상 연구 귀한사료 될 듯

조선왕조 제21대 임금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년. 사도세자 친누나, 정조 친고모)의 묘가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고려문화재연구원, 남양주시에 따르면 이 묘는 화협옹주와 남편 영의정 신만의 아들 영성위 신광수(永城尉 申光綏)의 합장묘로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어머니 후궁 영빈 이씨를 닮아 미색이 뛰어난 화협옹주는 11세에 옹주 봉작(封爵)을 받았고, 영성위 신광수와 혼인했으나 후사 없이 20세에 홍역을 앓아 사망했다.

화협옹주 묘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지난해 8월이지만 당시 매장문화재 발견신고를 한 삼패동 산43-19번지 일원, 일명 평구마을 주민들은 이것이 화협옹주 묘인지 알지 못했다.

발견신고 이후 지난해 8월 조사에서는 개방된 석함 1개와 그 속에 들어 있는 목제 마(馬)가 발견됐고, 그해 11월 긴급조사에서 봉인된 석함 1개와 그 속에 있는 백자명기 등이 발견됐다.

이때까지 이것이 누구의 묘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마을주민들은 단지 1970년대에 남양주시 진건읍으로 어떤 묘가 이장을 했다는 것만 기억해낼 뿐 확실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된 것은 이달이다. 남양주시가 문화재청의 긴급발굴조사비를 받아 진행한 12월 2차 조사에서는 화협옹주 묘가 맞는지 입증할 수 있는 유물이 다수 발굴됐다.

망자의 이름과 행적 등을 기록한 묘지(墓誌)에는 회곽묘 오른편에 ‘유명조선화협옹주인좌(有名朝鮮和協翁主寅坐)’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고, 1장 석판으로 이루어진 지석 앞면과 뒷면, 옆면에는 총 39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옆면에 ‘어제화협옹주묘지(御製和協翁主墓誌)’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석판은 12월 조사 직전 한 마을주민이 현장에서 발견해 소장하고 있다가 조사가 진행되자 당국에 제출한 유물로, 아버지인 영조가 직접 지은 글로 밝혀졌다.

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3호 석함 출토유물, 청화백자 합, 청동거을 등(사진=문화재청)
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3호 석함 출토유물, 청화백자 합, 청동거을 등(사진=문화재청)

그밖에 현장에서는 세 번째 석함인 봉인된 석함 1개가 추가로 발견됐다. 여기에도 또한 사료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다수 담겨져 한국 사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발견된 석함에는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쓰던 화장품이 무엇인지 연구할 수 있는 도자기에 담긴 고형물과 용기 등이 발견돼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옹주 묘 터에서는 묘지(墓誌)와 지석(誌石), 청화백자합 10점, 분채(粉彩) 1점, 목제합 3점, 청동거울, 거울집, 목제 빗, 화장도구로 추정되는 기물, 직물류가 이달 발굴됐다.

특히 청동거울에는 일본산인 것을 알 수 있는 상표가 확인돼 어떻게 일본산 거울이 당시 신분이 높은 계층에 유입됐는지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시 관계자에 따르면 청동거울에서 확인된 상표는 지금도 존재하는 일본 상표로, 함께 발굴된 채색도자기 또한 일본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과 고려문화재연구원, 남양주시 등 관계 당국은 앞으로도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화협옹주 묘를 더 세밀히 조사할 예정으로, 어느 곳으로 유골이 이장됐는지 등도 파악할 예정이다.

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사진=문화재청)
남양주시 삼패동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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