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리고 문학

글 주기철
사진 주기철
 

 몇 해 전에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났건만 아직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니 나이를 헛먹었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이렸다.

 역사를 공부해 거울을 삼아보자 했던 소싯적의 포부는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얼룩진 거울을 보며 문학이라는 옷을 찾아 입었더니 맵시는커녕 세상보기 부끄러워 차라리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더라. 차라리 민낯에 알몸이었다면 똑바로 해를 쳐다봐도 당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운명론자적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여 올해 봄 소싯적부터 읽어왔던 역사책이며 문학책이며 평생의 재산이라 생각해 왔던 그 알량한 서재를 통째로 들어내 공중분해 하기에 이르렀다.

 몇 개월에 걸쳐 이리저리 필요한 사람을 찾아 책을 나눠주고, 마지막 남은 책을 마을 도서관을 차린다는 서천의 선배에게 실어다 주고 돌아서니 다소 서운함이 뒤따르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리라. 하지만 그 서운함 뒤에 감춰진 후련한 마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런 것이 비움의 철학인가?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에 와서 가만히 그 때의 느낌을 되새겨 보면 화장실에서 쾌변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워지면 비워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는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속해있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속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아둔하여 이런 이치를 깨닫는데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지만 초등학생이라도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채움에 몰두해 있고, 비우지 못해 일어나는 다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문제는 지식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그 뒤에 발생하는 행동이 아닐까하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물론 지식이나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행동을 하기에 앞서 깨달음이나 지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깨닫고 난 뒤에는 당연히 깨달은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깨달으면 뭘 하겠는가.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진리는 아무리 그 뜻이 높고 거룩해도 공허할 뿐 아니겠는가.

 그렇게 역사고 문학이고 나름대로 비우고 난 요즈음 왕릉문학이라는 모임을 통해 다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문학이라는 옷을 다시 한 번 입어볼 수 있겠다는 흥분된 기대감을 품고 모임을 일구어 본 것이다. 이제 얼룩진 거울을 닦아내고 옷매무새를 고쳐보자. 젊은 시절 한 때 열광했던 근사해 보이는 맵시보다는 그저 똑바로 하늘을 보고 웃을 수 있는 하루를 살아보는 거다.
 

왕릉시편王陵詩片
 

건원릉 유령거미
 

세월은

바람처럼
이끼 낀
나무 곁에
머물고 있다

저기
누워 있는
저두사고향低頭思故鄕
있는 듯
없는 듯
달빛을 낚고 있는
 

동구릉 우화
 

꾸루룩
수상한 세월
속이 뒤집히니
동쪽 아홉 능이 쏟아진다

능청맞게 살아나는 왕조의 시체들
슬며시 뒷짐 진 손에는
일찌감치 아침을 준비하는
‘모닝캐어’ 한 병씩

왕이며
비며
꼭두섰던 구중궁궐 비밀스런 걸음들이
짭짤한 입장료 수입으로 벌겋게 들뜬
천 원 권 퇴계를 앞세워
전통시장 봄나들이를 나선다

곱창이 맛있다나
돼지족발 순대가 맛있다나
허구한 날 먹던 아침이슬 말고

독재자의 머리통에 먹였던 총알처럼
톡 쏴대는 그 ‘참이슬’ 한 병
우렁차게 한번 마셔보는 거다
2차는 물 좋은 나이트클럽 부비부비
살아생전 요런 호사가 있었을까

밤이 깊은
동구릉
슬그머니 봄 익어가는 소리
 

동구릉에 핀 버섯
 

어제부터 비를 쏟던 하늘인데요
아침에는 제법 물안개도 피었다가
슬그머니 뒷걸음질로
봉분을 애무하다 사라지는데요
안마당에 잔디들은 밤새
물을 흠뻑 먹었는데요
해야 해야
어서 나오너라
초록이 기지개를 맘껏 켜는데요
외출에서 돌아오신 임금님들
누굴 만나고 오셨는지
금침衾枕 같은 잔디밭
우산을 펼쳐 놓으셨네요


뒤주 속에서


여기가 끝인가 보다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감각으로도
만져지는 것 없으니
예가 거긴가

놓고 나니 이리도 가벼운 것을
아픔 한 올도 삶이었구나

꽃은 바람에 떨고
바람 저무니
소곤소곤
마지막
한 숨


사릉유감


흰 저고리
옷고름 자락에
자지동천 물결 스치면
꿈이기엔 너무 선한 자줏빛
그 리 움

지나간 밤낮을 반추하는
솔잎들의 속삭임
유택에
잠을 깨니
왕후라 칭하더라
 

역린逆鱗
 

그 마음에
머물지 못해
간두 끝
효수梟首로 남는다

역류한 피가
온몸을 빠져 나가고
잠깐
푸른빛의 하늘이 스친다

여기가 시작이다
웅성웅성
뜨거운 시선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왕릉


더 누워 있어야 한단다
천년이 지나도

수수께끼 같은 잠은 깨지 않고
재방송 되는 꿈도 없어

세상 어디 누울 곳 없는
바람 한 점 붙들고

날 좀 데려가
어디든지 데려가

빈 하늘 썩어빠진 메아리만
풍장처럼 흩어진다
 

왕릉에서
 

아침마다
조선의 왕릉에는
한숨처럼 짙은 안개가 살아난다

이슬로 증발하는 꿈속에서
스펙트럼으로 흩어지는
저기 나비 한 마리

왕들은
또 일어나
비단자락 왕비의 치마폭에서
수줍은 역사를 되뇌인다

나는
오늘도
죽고 죽는데
 

청령포, 1457
 

절름발이 봄 하나
절뚝절뚝
만신창이 피눈물로 왔다

몇 밤인가
소리 없이 육육봉에 스민 울음
한 송이도
터뜨리지 못한
봄, 그리고

여름
한바탕 홍수로
눈물 펑펑 쏟아 붓고

붉게 타는
가을에
지다
 

하나
 

鵬―
강화 하늘을 놀던 새

朋―
그깟 친구 하나 잊지 못해

崩―
세상을 놓아 버렸다네
 

저작권자 © 구리남양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