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2018년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기상천외함과 스피드 열풍 속에서 관객들을 잠시 침잠의 분위기로 이끄는 영화 한 편이 주목을 끌고 있다.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관람석 곳곳에서는 조용한 울음들이 터져 나왔다. 관람객들은 이 영화에 높은 평점을 주며, 작품에서 투영된 가족의 의미를 헤아려보거나 작품의 완성도 및 배우들의 연기력을 높게 사고 있다.

지난 7월 26일에 개봉해 13일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의 성공적 흥행에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라는 타이틀이 한몫했음에는 분명하다. 2001년부터 여러 작품을 통해 칸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로는 심사위원 대상을 받기도 했다. 히로카즈 영화를 아끼는 국내 마니아층이 두터워지면서 그가 처음으로 만든 <환상의 빛>(1995)이 2016년에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원더풀 라이프>, <공기 인형>, <세번째 살인> 등의 문학적 서사 구성과 <아무도 모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 등에서 엿보이는 다큐멘터리 감성은 히로카즈 감독의 경력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에는 TV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사회의 제반 테마들을 다루어왔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항상 ‘가족’을 그려낸다. 가족은 <환상의 빛>이나 <원더풀라이프>에서는 스토리 구성의 중요한 단서가 되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중요한 가치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에서 가족은 시간의 축척이 만든 인간애의 의미로 확장된다. 그에게 가족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원더풀한’ 순간에 옆에 있었던 존재들이며, 혈연을 넘어 ‘시간’을 함께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영화를 통해 그는 ‘사회’에 주목한다. 가족 이야기라는 큰 물줄기 사이사이로 사회의 제반 문제를 생각할 물고를 틀어 놓는다. 예를 들어 자식이 뒤바뀐 두 가정이 겪는 갈등과 화해를 그려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두 가족의 거주지와 직업을 통해, 유기농법이나 옛 모습이 살아 있는 도시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실화에 바탕을 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처럼 히로카즈는 실화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사회의 문제들이 정교하게 교차하게 만든다. 1988 도쿄 스가모 어린이 방치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현실의 잔혹함보다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그려냈듯이 2016년 연금사기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어느 가족>을 통해 감독은 현실의 사회 문제와 가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대화의 문을 연다.

타자와 생명
생명은 / 자기 자신만으로 완결될 수 없도록 /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

이 구절은 히로카즈 감독이 <걷는 듯 천천히>라는 책에서 인용한 요시노 히로시의 <생명은>이라는 시의 일부다. 소품 형식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이 책에는 그의 작품 세계가 소소하게 드러나 있다. 히로카즈 작품들에는 항상 ‘조우’와 ‘어울림’이라는 평범한 인간 행태들이 가치 있게 조명된다. <어느 가족>은 결핍을 서로 채워나가는 생명들의 모습을 담담하면서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느 가족>은 네 명으로 이루어진 한 식구의 일상적 모습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은 할머니의 연금에 의지해 살고 아버지는 좀도둑질을 하고, 엄마는 힘든 노동을 한다. 이상해 보이지만 이들의 일상은 따뜻하다. 이웃의 학대받은 어린 여자 아이를 데려와 가족의 일원으로 삼는 인간애도 지녔다.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구성원들의 정체 혹은 아픔들이 드러난다. 이들은 혈연이 아니라 어떤 결속의 끈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결핍되어 있는 부분들을 서로 채워주며 생명의 혼으로, 육으로 묶여진 끈이다. 이들을 둘러싼 상처들은 노인 방치, 아동학대, 여성 착취, 노동과 실업 등의 사회적 병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며 어느덧 진짜 가족이 되지만, 결국 한 사건을 계기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위기는 파국을 예측하게 만들기보다는 가족의 핵심, 즉 생명들의 결속을 감지하게 만든다.

말과 침묵
사건의 발단은 좀도둑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万引き家族 좀도둑가족>이다. 아버지는 데려온 아들(쇼타)과 딸(린)에게 좀도둑을 가르친다. 어느 날 쇼타는 일부러 좀도둑 장면을 들킨 후 도망을 치다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 후 다치게 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살인과 사체유기, 아동 유괴 등의 말들이 취조인과 언론의 입을 통해 가족 구성원과 사회에 매정하게 미끼처럼 던져진다.

역설적이게도 이 법적이며 윤리적인 ‘말’들은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한 채,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의심을 심어놓는다. 그러나 이 ‘말’의 야비한 힘들을 무색하게 하는 침묵의 위력을 이 영화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말해지지 않은 그것이었다. 해변의 파도소리 위로 퍼진 소리 없는 할머니의 작별 인사, 달리는 버스의 덜컹거림 위에 쇼타가 침묵으로 새긴‘아빠’라는 속삭임. 가족구성원들을 지켜내기 위해 일부러 붙잡히려 했던 쇼타의 마음에서 아저씨는 이미 아빠라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파도와 도약
히로카즈 감독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을 시적인 장면으로 표현해내는 데 탁월하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해변 나들이 장면이 그렇다. 파도와의 장난, 즉 밀려오는 파도 위로 서로 손을 잡고 동시에 뛰어오르는 소박하고 즐거운 도약. 이러한 도약이 바로 가족의 힘이 아닐까. 린은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갔지만, 베란다의 화분이 빛을 향하듯 용기 있게 고개를 내밀어 밖을 응시하며, 쇼타는 마음에 사랑을 담고 세상의 길로 나아간다.

좀도둑 소년이었던 쇼타의 이러한 결말은 켄 로치 감독의 <엔젤스 쉐어>의 엔딩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둑질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지는 <엔젤스 쉐어>가 관객으로 하여금 ‘진짜 도둑이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처럼, <어느 가족>은 ‘버리고 방치하는 이들은 진짜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버려진 ‘쇼타’는 ‘가족으로서의 타자들’을 만나 함께 누린 삶의 체험을 통해 건강한 소년으로 자라날 것이다. 비록 온전하지 못한 좁고 너저분한 집이었지만, 쇼타는 작고 고요한 벽장 공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기도 했다. 히로카즈 감독은 집을 이루는 요소들, 다시 말해 친숙한 사물과 창문이나 문, 거실, 마당 등을 통해 영화적 감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전략을 펴고, 길이나 계단 등의 시공간적 이동 요소들을 표현의 함축적 매개체로 삼기 때문에, 영화에서 이 부분을 살펴보는 것도 감상의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아버지와 아이가 따로 걷던 두 갈래의 길이 결국 하나로 합쳐졌다. <어느 가족>에서 아들이 달려가는 길과 아버지가 걷는 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끝났지만 그들의 두 길이 언젠가는 꼭 교차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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