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3.1운동사

승인2015.02.28 14:08l수정2015.03.0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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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교회와 남양주문화원이 주최한 화도 3.1운동 기념 '횃불대행진'(사진=월산교회 제공)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조선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서울에 이어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은 개성이었다. 3월 3일 개성에 이어 7일에는 시흥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와 더불어 동맹휴학을 했으며, 9일에는 인천, 10일에는 양평, 11일에는 안성과 양성, 14일에는 남양주시의 이전 행정지명인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남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3월 13일 양주군 미금면(渼金面) 평내리(坪內里)에서는 구장 이승익(李昇翼)이 평내리 주민을 소집해 놓고 조선총독부 하세가와(長谷川好導) 총독이 각 지역에 하달한 고유문(告諭文)을 읽어 내려갔다.

"국민들은 쓸데없는 유언비어에 열중하여 되지도 않은 일에 광분하지 말라. 제국은 전승국이므로 일한 합병에 관하여는 조금도 변경이 없다"

주민들은 고유문 내용을 듣고 야유를 퍼부었다.

곳곳에서 “우리도 만세를 부릅시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이날 우보현(禹輔鉉), 정기섭(丁基燮), 김영하(金永夏)를 중심으로 1백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본격적인 시위는 14일 일어났다. 다음날 모인 150여 명의 주민들은 평내리에서 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가 있는 금곡리(金谷里)로 향했다.

하지만 금곡으로 향하던 이들은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승익, 김영하, 우보현, 이보영(李輔永), 이석준(李錫俊),  정기섭 등 다수 주민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들은 국가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이승익 징역 10월, 김영하와 우보현, 이보영, 이석준은 각각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옥중 순국하다
평내리 주민들이 만세운동으로 잡혀간 날 와부면(瓦阜面) 송촌리(松村里)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 와부만세운동의 주역 용진교회

14일 이정성(李正成), 이춘경(李春經), 김현덕(金顯德), 김정하(金正夏)는 용진교회 교인 등 마을주민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15일 와부면 일대를 순회하는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5일 날이 밝자 이들은 이정성, 이춘경, 김현덕 등은 김덕여(金德汝), 정일성(鄭一成), 이갑동(李甲同), 오성준(吳成俊), 김덕오(金德五), 이정운(李正蕓), 김윤경(金允京), 이건흥(李建興) 등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진중리(鎭中里), 조안리(鳥安里), 능내리(陵內里), 팔당리(八堂里)를 거쳐 면소재지가 있는 덕소리(德沼里)로 행진을 했다.

중간에 김태현(金泰鉉), 김현유(金鉉有), 박경식(朴景植), 문광채(文光彩), 이내한(李來漢), 박수만(朴壽萬) 등이 합류하는 등 조안리와 그 부근의 마을을 지날 때는 어느덧 시위대가 5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덕소리에 도착한 이들은 면사무소 주위를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그러자 서울에서 지원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막아섰고 선두에 있는 김윤경과 이정성, 정일성을 붙잡아 갔다.

성난 군중은 체포된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총칼로 위협하는 일본 헌병에 맞서 주재소까지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위기감을 느낀 헌병들이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다.

주민 40명이 연행됐고 이 가운데 17명이 기소됐다.

시위를 주도한 김춘경(金春經)과 김현모(金顯謨), 이정성 등은 1년 6월의 형을 언도 받았다. 함께 만세운동에 나섰던 김덕여, 김덕오, 김윤경, 김현유, 박수만, 오성준, 이갑동, 이정운, 정일성 등은 징역 8월에 처해졌으며, 조안에서 합류한 박경식도 징역 8월, 다만 이내한은 처음에 징역 8월이었다가 형이 늘어 징역 11월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징역 8월을 선고 받은 문광채(文光彩)가 재판을 받다 그만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본 헌병 발포로 10여명 사상
이렇게 와부면 만세운동이 일경의 총칼 아래 좌절됐지만 양주군의 만세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화도면(和道面)에서도 만세운동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월산교회 이인하, 이택하, 김우동, 김필규(金弼圭)와 월산리(月山里) 주민 이달용(李達鎔), 이승보, 이재하, 이덕재, 이택주, 유인명, 홍순철, 윤태익 등이 거사를 모의했다.

하지만 16일 일경에 의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됐고 이승보, 이재하, 이택하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 학생 군인 등 청년들의 참여로 장관을 이룬 화도만세운동 계승 횃불대행진

18일 밤 200여 명의 주민들은 면소재지가 있는 마석우리(磨石隅里)로 향했다.

구영식(具永植), 권은(權殷) 등 답내리(沓內里) 주민과 강선원(姜善遠), 김원석(金元石), 이승면(李承冕), 남궁우룡(南宮又龍), 윤준(尹俊), 이윤원(李允遠) 등 월산리 주민이 앞장섰다.

마석우리 헌병 주재소 앞에 다다르자 시위대가 어느덧 1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분위기가 과열되자 일본 헌병은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이달용, 손복산(孫福山), 신영희(申榮熙) 등 5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강덕녀, 윤균, 윤정석, 원대현, 이재혁 등 많은 주민들이 중상을 입었다.

날이 새기도 전에 일본 헌병은 시위에 나선 마을 주민을 잡으러 나섰다.

거사를 계획한 김필규 이외 시위에 참여한 이승보, 강선원, 윤성준, 남궁우용, 김원석, 권은, 이윤원, 이복현, 강순필 등 마을 주민이 다수 일본 헌병에 검거됐다.

붙잡힌 권은, 김원석, 강선원, 남궁우용, 윤성준, 이승보 등은 수개월 간 옥고를 치렀고, 운동을 주도한 김필규는 징역 6월을 선고 받았지만 모진 교문을 견디다 못해 그해 7월 그만 옥중에서 사망했다.

「피고는 대정 8년(1919년) 3월 18일 오후 10시경 이달용이라는 자의 권유에 의하여 손병희 등이 선언 고취한 조선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수 십 명의 군중과 함께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우리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같은 해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이 김필규에게 내린 판결이다.

화도만세운동 전국에 영향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가 발행한 「삼일운동사」에 따르면 3.18 화도만세운동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처음 발생한 처참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양주군 만세운동은 다소 주춤했지만 고양, 부천, 용인, 이천, 김포, 파주, 포천, 연천, 광주, 여주, 장연 등지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초 학원 중심으로 동맹휴학을 하는 등 소극적 만세운동이던 것이 3.18 화도만세운동을 계기로 대형화 또는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됐다.

화도만세운동 참사로 한 동안 양주군 만세운동이 침잠했다.

하지만 3월 24일 만세운동이 다시 터져 나왔다. 진접면(榛接面) 금곡리에서 청년 13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진건∙진접∙별내 만세운동
진접면 금곡리 청년들이 시위를 한지 4일 뒤, 3월 18일 진접면 부평리(富坪里)에 거주하는 이재일(李載日)에게 봉선사 승려들이 배포한 것으로 보이는 한 통의 격문이 날아들었다.

“금년 3월 조선 독립을 위하여 시위운동을 일으키고 조선 독립만세를 부릅시다”는 내용이었다.

이재일은 즉시 마을 사람에게 격문을 돌렸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만세운동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거사일은 3월 31일로 정해졌다.

당일 시위 장소인 광릉천변(光陵川邊)에는 600여 명의 인근 주민들이 운집했다.

최대봉(崔大奉), 박돌몽(朴乭夢), 최대복(崔大福), 유희상(柳熙庠), 이흥록(李興祿), 최영갑(崔永甲), 양삼돌(梁三乭) 등이 앞장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즉시 출동한 일본 헌병은 시위를 주도한 이재일과 양삼돌 등 8명 전원을 사냥하듯 낚아챘다. 이 일로 이재일은 1년, 이흥록은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일에 앞서 서울 종로에서 약종상(藥種商)을 하는 김석로(金錫魯)와 이순재(李淳載), 김성암(金星岩), 강완수(姜完洙) 등 봉선사 승려들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어 진접면 일대에 배포하기로 미리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 비밀리에 모여 약 200매 정도의 유인물을 인쇄해 승려 강완수 등 2명이 그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부평리, 진벌리(榛伐里) 등 인근 4개 동리 민가에 격문을 배포했다.

문건을 배포한 후 동조자 포섭에 나섰던 승려들은 바로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결국 이순재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고 강완수와 김성숙도 각각 징역 8월과 6월을 선고 받았다.

봉선사 승려들이 유인물을 배포한 29일 진건면(眞乾面) 오남리(梧南里)에 사는 나상규(羅相奎), 손삼남(孫三男), 엄본성(嚴本成), 이종갑(李鍾甲), 여원필(呂元弼), 권노적(權魯赤), 한백석(韓白石) 등 주민 수십 명도 모여서 만세운동을 했다.

또 같은 날 별내면(別內面) 퇴계원리(退溪院面)에서도 2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5명이 체포됐다.

19살 청년의 기개
지금은 의정부로 편입 돼 있는 당시 별내면 고산리(高山里)에 살던 19세 청년 유해정(柳海正)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3월 하순 어느 날 유해정은 붓을 들어 일왕에게 편지를 썼다.

임금님을 속이고 한국을 강탈한 나머지 태황제 고종 폐하를 독살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가 갈림을 참을 수 없다. 만국이 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음에도 이를 돌려주기를 꺼린다면 분개한 백성이 일제히 궐기하여 불의의 나라에 보복할 것이다. 나도 한 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 번 죽음으로써 원한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 미국 강화회의 위원은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연합국이 손을 잡고 그 죄를 물을 때에는 호랑이 앞의 토끼 신세가 될 것이다

유해정은 편지에서 일본 천황을 ‘일본왕전하(日本王殿下)’ 또는 ‘왕(王)’이라 부르고, 고종 황제를 ‘태황제폐하(太皇帝陛下)’라 호칭했다.

이 편지는 3월 27일 도쿄 부청 서무과에 도착했으며 그해 4월 9일 궁내성 궁내대신 관방 총무과로 전달됐다.

이 봉서(奉書)사건으로 유해정은 천황에 대한 불경행위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혔다.

만세운동 횃불로 타오르다
일제의 탄압이 거셀수록 만세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다.

평지에서 시위를 할 경우 일경의 폭력 진압으로 희생이 늘어나자 시위 가담자들은 시위 현장을 산으로 변경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어떤 이는 횃불을 들고 어떤 이는 태극기를 휘둘렀다. 수백 명의 군중이 북소리에 맞춰 횃불을 들고 산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들은 검거하러 올라오는 일경을 따돌리고 신속하게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게릴라식 산상횃불시위는 경기도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3월 23일부터 4월 14일까지 고양군, 시흥군, 광주군, 부천군, 수원군, 개성군, 강화군, 장단군, 파주군, 김포군, 양주군, 진위군, 이천군, 여주군 등에서 산상횃불시위가 이루어졌다.

한편 수원군에서는 기생조합 소속 김향화(金香花)가 검진 차 자혜병원으로 가던 도중 여러 기생들과 함께 일제히 만세를 불렀으며, 귀가할 때에도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는 일본 헌병이 만세운동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당시 정황으로 보면 목숨을 내건 행동에 다름 아니었다.

제암리∙화수리 학살사건
이렇듯 경기도의 만세운동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또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기도가 입은 피해 또한 상당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보병 79연대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수원군 향남면(현재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提巖里)에서 마을 주민 24명을 교회에 모아 놓고 총칼로 참혹하게 학살했다.

경기 남부에서 시위가 격화된 것은 3월 말경이었다.

3월 26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현재 화성시)에 사는 홍면 등 주민 120명은 구장 홍명선(洪命善)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결의한 뒤 이날 밤 11시 까지 만세 운동을 벌였다.

시위는 27일에 이어 28일까지 많은 주민이 시위 대열에 가담하면서 줄기차게 이어졌고 어느덧 군중은 7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를 진압하러 수원결찰서 노구치(野口廣三) 순사부장과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 주재소 마스우치(升內) 순사 그리고 마스우치를 따라 순사보 조종환(趙鐘桓), 김학응(金學應)이 나타났다.

이들은 시위 군중에게 권총을 뽑아 들고 홍면, 홍효선, 예종리를 체포했다. 홍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일경에 항의 했다.

그러자 노구치 순사부장이 홍면의 오른쪽 어깨를 쏘아 쓰러뜨렸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홍면의 동생 홍준옥이 "우리 형이 총을 맞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 총 쏜 놈을 죽여 주시오!"라고 울부짖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던 노구치를 군중이 에워쌌다. 노구치는 분노한 군중들의 타격으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시위는 날로 격화됐다. 3월 30일 제암리 주민 안정옥, 안종환, 안진순, 홍원식 등은 수원 발안장(현재 화성시 향남면 발안리)과 수원 수촌리(현재 화성시 장안면) 주민과 함께 발안 주재소 앞에서 투석전을 벌이다 일경의 칼에 제암리의 김덕용이 옆구리를 찔렸고 홍원식, 안종후, 안봉순, 강태성, 김정헌, 김성렬 등이 체포됐다.

시위가 4월로 넘어서면서 만세운동은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4월 1일 수원 팔탄면 고주리(현재 화성시)의 천덕산, 제암리의 진례산, 수원 가재리(현재 화성시 팔탄면)의 당제봉에서 저녁 7시를 기해 일제히 봉화가 타올랐다.

4월 3일에는 일본인 순사 한 명이 더 살해됐다.

이날 오전 11시30분경 수촌리, 석포리, 우정면 주곡리 주민 300여 명은 석포리를 거쳐 조암(朝岩) 장터에 이르렀다.

어느덧 2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 앞에 차희식(車喜植)이 나타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삼창했다.

군중은 감격스러워 하며 만세 삼창을 따라하고 조선이 독립되었다고 기뻐했다.

이들은 장안면사무소에 다다라 서류와 집기를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오후 3시에는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인근 쌍봉산으로 오른 뒤 장안면과 우정면을 바라보며 만세를 불렀다.

장안면을 출발한 시위행렬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했다. 이때 군중 속에서 “우리들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것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에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나온 행동입니다. 앞 사람이 죽으면 뒷사람은 굴하지 말고 전진합시다”라는 비장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위대는 차병혁(車炳爀)을 앞세워 우정면사무소로 향했다. 이들은 면사무소에 도착해 서류를 불사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열광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한각리(閑角里) 작은 산으로 향했는데 산이 사람으로 뒤덮였다. 이들은 여기서 우정읍 화수리(花樹里) 주재소 습격을 계획했다.

“우리가 주재소에 가면 아마 헌병이나 일본군대가 와서 발포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쪽에 죽는 자가 생길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후퇴하지 말고 사망자를 발판으로 하여 총을 쏜 일본군을 잡아 죽여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누군가가 배수의 진을 친듯한 비장한 목소리로 군중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를 뱉어냈다.

이때 군중들도 화답하듯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최장섭(崔長燮)은 우정면(雨汀邑) 한각리(閑角里)의 송지문(宋志文), 박재남(朴在男), 김백민(金伯民), 김석봉(金石峰)과 함께 2천5백여 명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

이들이 주재소로 쳐들어가자 일본인 순사부장 천단태랑(天端太郞)이 처음에는 공포를 쏘아 군중을 해산시키려다 나중에 실탄을 쏘았다.

군중 속에서 송 노인이 쓰러지고 두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최장섭이 큰 목소리로 “저 놈을 죽여라!”고 외친 후 돌을 집어 던졌다. 이 말에 군중이 다시 집결하여 일제 경찰과 석전(石戰)을 벌였다.

이윽고 최장섭이 던진 돌이 천단의 머리를 맞췄다. 천단은 이내 총을 떨어뜨리고 연이어 날아온 돌에 쓰러졌다.

일본 순사가 잇따라 죽자 보복이 시작됐다.

씻지 못할 만행
4월 5일 새벽 3시반경 일경은 장안면 수촌리를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일경은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를 불태웠다.

같은 날 발안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서는 유학자(儒學者)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일본 헌병의 칼에 무참히 스러졌다.

피의 보복은 4월 초부터 중순까지 장안면, 우정읍 일대를 휩쓸었다. 4월 11일 새벽 일경은 우정읍 화수리를 습격했다.

민가에 불을 지르자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마을 주민 수십 명을 학살했다.

40가구가 모여 살던 화수리는 사건 이후 모두 불타 18가구만 남았으며, 사건 이전까지는 비교적 부촌(富村)이었으나 이후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제암리 학살은 그의 연장선상이었다.

4월 15일 교회에서 마을 주민을 학살한 아리타 중위는 시체를 모두 불태우고 또 가옥 31채마저 불태워 제암리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잔학한 만행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리타는 곧 바로 10분 거리에 있는 고주리로 올라가 김흥렬과 김주업 등 일가족 6명을 포박한 뒤 집 뒤 언덕으로 끌고 가 참살했다.

김주업의 부인 한 씨는 결혼한 지 3일 만에 너무나 잔학한 가족들의 참살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 날로 자리에 누워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3.1운동, 세계사에 영향을 주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연해주, 만주, 하와이, 멕시코, 미국 필라델피아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만세운동이 거셀수록 일제는 악랄하게 진압을 서둘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만세운동 당시 피살된 사람은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사람 46,948명, 만세시위에 참가한 인원 2,023,098명 그리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와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라고 밝혔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202만 명이며 시위가 열린 횟수는 1,542회에 달한다.

전국 218개 군 가운데 97%에 해당하는 212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피해범위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일본은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했고 1만2천명이 체포됐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일부 학자는 3.1운동이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실제 중국의 5·4 운동 ‘북경 학생 천안문 대회 선언문’에는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을 때 정의, 인도, 공정이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청도(칭다오)를 우리에게 돌려주고, 중일 비밀 조약, 군사 협정, 기타 불평등 조약들을 폐지함이 정당하고 공정하다. 그러나 힘 앞에 정의가 무너져 장차 5대국이 우리 영토를 마음대로 하게 될 것이다. 우리를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처럼 대접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정하다. 알사스, 로렌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프랑스인들은 이렇게 외쳤다. "되찾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아드리아 해협을 찾기 위한 투쟁에서 이탈리아인들도 '죽음'을 외쳤다. 조선인들도 독립 운동을 하면서 부르짖었다. "독립을 하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인도의 독립운동가 자와할랄 네루가 자신의 딸에게 쓴 편지에는 「상쾌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조선은 일본의 총칼 아래 민족정신을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일본은 처음 얼마 전 근대적인 개혁을 실시했으나 곧이어 마각을 드러냈고 조선 민족은 독립 항쟁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조선의 청년들은 맨주먹으로 적에 항거하여 용감히 투쟁했다. 3.1운동은 조선 민족이 단결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으려고, 수없이 죽어가고 일본 경찰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숭고한 독립 운동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 일본인에 억압당한 조선 민족의 역사는 실로 쓰라린 암흑의 시대였다. 조선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곧장 대학을 나온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화도 3.1운동 계승 “횃불대행진”

▲ 월산교회 교정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남양주에서 일어난 평내만세운동과 와부만세운동, 화도만세운동, 진접만세운동, 진건만세운동, 별내만세운동은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

특히 화도만세운동은 사가(史家)들도 그 가치를 인정할 만큼 경기도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화도만세운동을 계승한 남양주 만세횃불운동은 당시 만세운동의 주역인 월산교회를 중심으로 지금도 해마다 열리고 있다.

당초 남양주 3.1운동 기념행사는 와부만세운동의 주역인 용진교회와 화도만세운동의 중심인 월산교회, 남양주문화원 등이 제각각 행사를 치렀었다.

그러던 것이 1989년 3.1운동 70주년을 기점으로 남양주문화원과 월산교회가 공동으로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하게 됐으며, 용진교회는 이전과 같이 독자적으로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남양주 3.1운동 기념행사가 명맥을 잇는 가운데 남양주 3.1운동 기념행사는 1999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3.1운동 70주년 1년 전 월산교회에 부임한 김풍호 목사는 3.1운동 기념행사를 횃불만세운동으로 행사의 형식과 내용을 탈바꿈 시켰다.

기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부른 뒤 독립유공자나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증정하던 행사에서 벗어나 좀 더 3.1운동 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그 날의 3.1운동을 1999년부터 횃불만세운동으로 재현한 것이다.

남양주 3.1운동 기념행사가 횃불대행진으로 성격이 바뀌자 행사 1년만인 2000년에는 당시 4대 일간지가 보도를 하는 등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상징적일뿐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횃불행진에 처음 주민들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남양주문화원과 월산교회가 공동주관하는 횃불대행진은 이후 화도동부번영회가 공동 주관자로 참여하면서 참가자가 대대적으로 늘어났다.

당초 마을주민과 화광중학교 학생들, 남양주문화원 관계자, 월산교회 교인, 일부 시민 150여 명이 참여하던 행사가 이제는 400여 명 규모로 행사가 확대됐다.

그리고 인근 부대 군인들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대오 정연한 횃불이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 학생, 군인 등 청년들의 참여로 장관을 이룬 화도만세운동 계승 횃불대행진

화도 횃불대행진은 매해 2월 28일, 월산교회를 출발점으로 당시 화도만세운동의 격전지 마석우리 광장까지 약 4km 구간을 횃불 든 군인 등 청장년이 선두에 서면 마을 어르신들과 화광중학교 학생들, 정치인들, 시민들이 함께 행진하는 행사로, 남양주 3.1운동을 계승한 대표적 행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화도 3.1운동 기념행사를 횃불대행진으로 기획한 월산교회 김풍호 목사는 26년간 화도 3.1운동 기념행사를 남양주문화원과 주관했고 횃불만세운동으로 재현한지도 16년이 지났지만, 화도 3.1운동의 본래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시설이 마땅히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당시 가장 희생이 컸던 화도읍 답내리 지역에 3.1운동 기념관이나 기념공원이 조성돼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한편 남양주 3.1운동사에 또 한 획을 그은 와부만세운동의 주역 용진교회는 2000년 무렵까지 비록 해를 걸러 열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빠지지 않고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했으나, 언제부터인가 3.1운동 기념행사를 하지 않고 있다.

용진교회 관계자에 의하면 독립유공자가 모두 사망한 상태에서 일부 유족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경기도가 주최하는 행사가 3월 1일에 열려 구지 자체 행사를 하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잘 사는 나라 돼야
남양주 3.1운동이 전국 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남양주는 목숨을 바쳐 만세운동을 했던 선열(先烈)의 뜻을 이어 받아, 각 고장에서 활발하게 계승사업을 펼치는 것은 물론 이를 만방에 알릴 필요가 있다.

▲ 1999년부터 화도만세운동을 계승, 횃불대행진을 열고 있는 월산교회 김풍호 목사

필요하다면 기념공원도 만들고 기념관도 건립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나아가서는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남양주가 독립운동의 성지였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까닭에 조국은 지금도 깊은 암운에 몸서리 치고 있으며 그 흔적에 고통 받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학문 그 어느 분야도 여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반면 관용(똘레랑스)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1940년 나치로부터 프랑스가 해방되자 프랑스 정부는 즉각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했다.

이 결과 99만 여명의 나치 부역자가 투옥되었고, 이중 5,700명은 사형, 2,700명은 종신강제노동, 1만여 명 유기한 강제노동, 22,800명은 징역, 5만 명은 공민권을 박탈했다.

더 나아가서 나치에 부역한 언론에 대한 처단은 더욱 살벌했다. 나치에 부역하지 않고 나치 점령기간에 자진 폐간한 극소수의 언론을 제외하고 모든 언론을 국유화 시키고 부역 경중에 따라 총살형, 재산몰수, 종신형 등을 선고했다.

반면 한국은 단편적인 예를 들어보면, 일제 강점기 당시 경찰 가운데 80%가 해방이후 현직에 복귀했다.

드골은 언론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애국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반역을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친일파와 그 후손이 대대손손 잘 사는 나라. 독립운동을 했던 자손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대를 이어 가난에 시달리는 나라.

국민소득 4만 불 시대 아니 그 이상이 돼도 이런 미완의 숙제가 남아 있다면, 미개하고 미천하다고 남들이 놀려도 따로 변명할 말이 없게 되는 것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참조문헌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2008 역사비평사,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 2014 책보세, ‘지식인의 죄와 벌’ 2005 두레, ‘중국현대사’ 1989 까치, ‘중국근현대사’ 1984 일월서각, ‘현대한국사’ 1973 신구문화사, ‘세계사편력’ 2005 일빛,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 유신사, ‘기미독립선언서’ 1919 조선민족대표, ‘동아시아를 만든 열 가지 사건’ 2008 창비, ‘중한관계사 근대편’ 2009 일조각, ‘프랑스인권선언’ 1789, ‘조선혁명사화’ 1933 자유동방사,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1983 미래문화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7호’ 1997 한국기독교 연사연구소, ‘독립운동사자료집’ 1971~197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운동사료’ 국회도서관, 논문 ‘몽양 여운형과 3.1운동’ 2009 강준식, 논문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재조명’ 2001 성주현

-참고기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공훈전자사료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국기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남양주문화원, 남양주시청, 용진교회, 월산교회

남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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